안녕하세요, Greener 님.

마케터 슬기입니다.

'성장'과 '경험'이라는 키워드가 자주 보여요.

그린레터에서도 제가 몇 번 언급했던

키워드들이기도 한데요.

요즘엔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성장을 꼭 해야 하는 건가?

생명체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가만히 숨만 쉬어도 성장은 한대요.

다만 자신에게 알맞은 성장이 있고,

건강하지 않은 성장이 있는 것이죠.

예를 들어 선인장의 경우엔 키가 위로 쑥

자라기만 한다면, 그건 건강한 성장이

아니라고 해요.

선인장은 빛을 많이 받아야 하는 식물인데

빛이 없는 환경에 놓이니까

살기 위해 위로 몸을 뻗어 올리는 거예요.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이 사회가 말하는 중요한 경험과 가치,

모두 습득해 내 것으로 만든다면 물론

성장할 거예요. 하지만 그 성장이 정말

나를 올바로, 건강하게 만드는 것일까요?

제가 최근에 여행을 짧게 다녀왔는데요.

이번 여행을 통해서 제 작은 강박이 깨졌어요.

여행에선 꼭 무언가를 새로 경험해야 한다는

강박 말이에요.

누군가 이번 여행에서 뭘 했냐고 물으면

특별히 대답할 에피소드는 없지만,

다른 의미로 저는 알을 깬 거예요.

님은 정말 자신에게 필요한 

양분을 흡수하고 있나요?

여행이라는 강박과 선물

몇 주 전 밤이었다. 침대에 누워 잠에 들려 하는데, 남편이 제주도에 가자고 했다. ‘갑자기?’라는 생각도 잠시, 나는 곧바로 남편의 생각에 합류했다. 즉흥파에 가까운 나와 다른 계획파 남편의 즉석 제안이 무척 반가웠으므로. 나는 즉시 항공사 앱을 켜 비행기 티켓을 사고 렌터카를 예약했다. 일정은 1박 2일로 잡았다. 남편과 나의 스케줄이 들어맞는 조건은 고작 이틀이었다. 아쉽긴 해도 여정이 짧으면 어떠랴. 그날 밤은 꿈도 꾸지 않고 다가올 소풍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잠에 들었다.

분주하고 느슨한 시간이 흘러 어느덧 제주도행 당일 아침. 그날 아침은 여행 당일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전날 밤까지 우리 둘 다 빡빡한 스케줄을 소화했던 터라 여태껏 짐 가방도 싸지 못한 상황이었다. 우리에게 준비된 것이라곤 비행기 티켓과 렌터카 이용권, 그리고 호텔 숙박권 뿐. 어쩐지 후회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심정이랄까. 원래 여행 일정을 짜두진 않지만, 가고 싶은 스팟 한 곳 정도는 꼭 정해두는 편이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정말 아무런 계획이 없었다. 

또 한편으론 ‘제주도를 1박 2일로 가냐’는 지인들의 의아한 반응에 풀이 죽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출장에 목적을 둔 적 말고는 이렇게 짧은 제주행을 택한 적이 없었다. 여행지로서 제주도는 비행기값에 응당한 가성비를 챙겨야 하는 곳으로 여겨왔으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지금 상황은 더욱 말이 안 됐다. 눈만 감았다 뜨면 지나갈 이틀을 여행이라 할 수 있을까? 게다가 이틀 내내 비 온다는데, 뭐라도 제대로 볼 수 있으려나? 오랜만의 휴가라며 들뜬 남편과 달리 내 마음엔 온통 실망을 예감하는 불평으로 가득했다.

제주도에 도착하니 우중으로 풍경이 흐렸다. 하늘이 회색빛이라 그랬는지, 아니면 그냥 내 마음이 삐딱했는지 몰라도 공항에서의 사람들이 보이는 환호는 시끄러운 소음으로 느껴졌다. 신경질적인 내색을 감춘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옆을 보니 내 기분을 살피는 것처럼 남편의 표정이 조심스러웠다. 남편이 물었다. “어디 몸 안 좋아?” 

아차 싶었다. 이 여행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제야 생각을 고쳐먹었다. 이틀을 알차게 보낼 순 없어도 그저 누리겠노라. 마음이 바뀌니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들이 달라졌다. 정확히 표현하면, 보이고 들리는 것은 똑같으나 다른 의미로 해석됐다. 

짙은 해무로 바다가 보이지 않았지만 오히려 청각이 극대화되어 철썩이는 파도 소리가 자연의 오묘한 외침으로 들렸다. 숙소로 향하는 길에 차 안에서 본 목장의 말들은 꿈속에서 본 듯한 신묘한 존재들 같았고, 거친 비바람에 흔들리는 청보리 밭은 너울을 일으키며 춤을 추는 듯했다.

이틀이라는 시간은 우리가 그간의 지친 기운을 회복하는 데 충분했다. 우리는 9시까지 늦잠을 자다가 일어나 호텔 조식을 배부르게 챙겨 먹고, 유유히 해변을 걸었다. 조개껍질을 줍고, 돌게를 우다다 쫓아다니며 놀렸다. 차를 몰다가 풍경이 좋은 곳이 보이면 차를 멈춰 세우고 남편은 낮잠을, 나는 노트북을 펴 일을 했다. 우연히 찾은 카페에서 쫀득하고 풍미가 깊은 레몬 케이크를 맛보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의 제주 여행은 끝났다.

집에 돌아와 사진첩을 열어 보는데, 별것이 없다. 대단히 자랑할 만한 것도, 오래 기억될 만한 장면도, 새로운 영감도 없다. 얻은 것이라곤 똑바로 선 기력. 며칠간 일의 즐거움을 잃어 무력했는데, 일하는 맛이 돌아왔다. 그뿐이다. 

더불어 내가 깨달은 것은 여행이 꼭 낯선 경험과 탐험의 영역일 필요가 없다는 것. 여행이 내게 안기는 선물은 각 시기마다 다르다. 어느 때엔 새로운 감각을 주기도 하고, 남들과 같은 경험을 숙제처럼 들이밀기도 하며, 이전의 상태로 몸과 마음을 되돌려 놓기도 한다. 나는 그저 그 시기에 내게 필요한 도구로서 여행을 만끽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