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eener 님, 안녕하세요!
레스벗그리너 브랜드 마케터 슬기입니다.

봄이 올 것 같아요, 벌써!
아침이 빨라지고, 낮도 제법 길어지고. 무엇보다 몸을 웅크리게 하는 칼바람도 불지 않습니다. 물론 꽃샘추위가 기다리고 있으니 아직 방심하긴 이르지만요. :) 이렇게 계절의 변화를 꼼꼼히 살피고 느끼면 삶이 참 재미있어집니다. 행복도 더 자주 느끼게 되는 것 같고요.

이렇게 봄이 기척을 보이면 살을 에는 추위도, 신경을 긁는 무더위도 모두 영원하지 않다는 걸 새삼 깨닫습니다. 계절은 멈추지 않고 흐르며 순환한다는 것을요. 아마 우리의 삶도 이치에 따라 타인의 세계와 미지의 세계를 끝없이 오가겠죠?

오늘은 에세이를 보내드리는 날입니다. 본업은 케이팝 작사가로 활동하며 다양한 영역에서 언어를 풀어내는 고예림 님의 이야기를 담았어요. 예림 님과 메일을 주고 받으며 '필요'와 '가치'의 동의(同意)에 대해 말하기도 했는데요. 저희가 나눈 짧은 대화를 먼저 나누며, 에세이를 전합니다. 님에게도 이 마음이 가닿으면 좋겠어요.

버리지 않는 오래된 물건

23년 새해와 함께 찾아온 한파에 옷깃을 잔뜩 올리고 몸을 움츠리던 어느 주말. 나와 친구들은 사용하지 않지만 여전히 쓸모 있는 각자의 물건을 바리바리 들고 와 한곳에 모였다. 플리마켓을 위해서였다. 계기는 디자이너 '파카'로부터였다. 그녀가 100일간 비움의 일환으로 ‘100개 버리기’ 프로젝트를 시작한다고 주위에 알리자 친구들이 하나둘 이 멋진 계획에 동참했다. '집 안 구석구석 비우고 샅샅이 청소하는 기회가 되겠구나', 싶어서 나 역시 냉큼 손을 들었다. 벌써 작년 늦가을의 일이다. 

하루에 하나씩, 쓸모없고 낡은 물건을 찾아 정리하자는 간단한 취지였으나 내 뜻대로 물건을 버리는 건 쉽지 않았다. 사용되지 않은 채 켜켜이 쌓인 물건들로 채워진 선반과 장롱을 들추어낼 때마다 죄책감이 옅은 한숨으로 새어 나왔다. 언젠가는 쓰겠거니 사용을 미루어 둔 식기와 조리용품부터 언젠가는 입고 신겠거니 고이 보관해둔 코트와 구두, 유통기한 지난 화장품과 조악한 잡동사니들까지. 벌써 수년째 손이 닿지 않은 물건이다. 후-우. 한숨 대신 마음을 다잡듯 큰 숨을 내쉬고는, 이유와 사연 하나쯤은 있는 물건들을 모조리 끄집어냈다. 낡고 망가진 물건들은 버리고 상태가 온전한 것들은 박스에 넣었다. 나는 그것들의 용도를 찾지 못했지만, 물건들이 더 좋은 주인을 만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정리는 마치 요가 수련이나 움직임 명상 같다. 지루한 반복, 그 끝에 찾아오는 심신의 개운함과 뿌듯함이 똑같다. 나를 돌아보게 해준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침대에 누워 SNS를 부유하다 혹하여 덜컥 구입하고는 한 번도 안 입은 요가 브라탑과 바지를 발견해 뜨끔한 어느 아침이었다. 멋진 이미지를 보고는 필요하지 않은 걸 사버린 나의 즉흥적인 소비패턴을 반성하다, 어느새 소유에 대해 얕고도 진지한 철학으로 이어졌다. ‘오랫동안 내 곁에 두고 싶은 건 무엇일까.’ 

간결한 짜임새, 아름다운 색, 다소 값이 나가도 좋은 품질, 여행지에서 만난, 이야기와 추억이 서린 물건. 지금껏 내가 잘 사용하는 오래된 물건들의 교집합이다. 또 뭐가 있을까. 지극히 사적인 취향을 탐색하는 것이 퍽 즐겁다. 

한겨울의 플리마켓은 무사히 마쳤다. 많은 물건들이 그 가치를 발견한 저마다의 주인을 만나 손에 들려갔다. 나의 불필요가 누군가의 필요가 되다니, 내심 기쁜걸. 몇몇 친구들은 이를 두고 물건의 순환, 물건의 연속성이라 멋지게 표현했다. 뭐 아무렴 어떠랴. 비우고 채우는 가운데 우리는 예전보다 더 뾰족한 기준과 취향을 연습하고, 반성하고 발견한다. 세월이 흘러도 퇴색하지 않는, 쟁쟁한 가치를 지닌 나의 오래된 물건을 만나기 위하여 말이다.